본데: 영화관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오펜하이머 전기 영화
누구나 어린 시절엔 원대한 꿈을 꿉니다. 그걸 이루는 이는 극소수입니다. 여기 어린아이들의 꿈을 이룬 한 사람이 있습니다. 파괴신이 되는 거죠.
과학자를 생각하면 몇 가지 떠오르는 스테레오 타입이 있습니다. 똑똑하지만 그 외에는 어수룩해서 자기주장이 별로 없는 너드 타입, 완전히 비주류로 학계에서 배척당하나 자기주장을 열심히 밀고 나가는 매드 사이언티스트 타입, 그리고 오만하며 고결하여 홀로 빛나는 슈퍼 천재 타입. 오펜하이머는 슈퍼 천재 타입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 알고 있는 파편적인 지식으로부터 연상된 오펜하이머의 인상은 수상할 정도로 카리스마 넘치는 과학자였습니다. 물리학 괴물들이 우글거리던 시대에 과학자들을 모아 악의 제국에 맞서다니 이거 완전 히어로 팀업 영화 한 편 뚝딱이잖아요. 촉박한 일정에도 계획은 멋지게, 필요 이상으로 멋지게 성공했고 악의 제국(들)은 몰락했습니다. 토끼를 사냥했으니 이제 무슨 순서다? 정치 타임~
영화는 시간대를 쪼개서 과거와 미래를 뒤죽박죽으로 보여주는데요, 현재(에 가까운 시간)이 흑백으로, 과거가 컬러로 표현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보통은 반대니까요. 그으런데. 마지막에 가면 그게 또 그렇지가 않았죠? 아, 치사해라. 영화 보기 전에 제 오펜하이머에 대한 인상은 제독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뭐. 그런 결론인 거죠. 사태는 언제나 보기보다 복잡하다.
오펜하이머의 정치적 평가는 상반되어 있습니다. 교활하다. 순진하다. 두 가지죠. 둘은 같이 갈 수 없습니다. 교활한 척, 순진한 척을 할 수는 있어도 교활하면서 순진할 수는 없죠. 개인적으로 이러한 평가는 인간적 카리스마가 불러일으키는 혼란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보다 크게 보이게 하는 능력이죠. 덩치가 크니 무리의 왕으로 삼는 자도 있는 것이고, 덩치가 크니 필요 이상으로 위협을 느껴 적대하는 자도 있는 것이고, 그리고 실체를 간파해 그 오만함을 우습게 아는 자도 있는 것입니다.
상당히 독특한 캐릭터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정치적인 과학자라는 평이고 본인도 그렇게 굴려고 노력했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았죠. 오히려 나중에는 본인이 가장 정치적이지 않았던 영역에서 구원투수가 옵니다. 과학계죠. 합리와 사실로 세상을 이해하려 했던 사람들이요. 그들에게도 이념과 도덕은 중요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사실이기에 사실로밖에 말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정치 논리가 한방 먹었죠.
이기적이다, 오만하다, 이해할 수 없다. 오펜하이머를 내내 따라다니는 수식어입니다만. 사실 영화에선 그런 걸 느낄 장면이 별로 없습니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면 꽤 많긴 한데 다 너무 사소해요! 재수 없음이 너무 사소한 나머지 그 상대역들이 너무 쪼잔해 보일 정도라고! 이건 배우 때문이 큰 것 같은데 아마 킬리언 머피가 3시간 내내 길거리를 걸어 다니며 사람들 뒤통수를 치는 짓을 한다 해도 동정표를 받을 겁니다. 분명 그럴만한 내적 고통이 있었음에 틀림없어.
핵폭탄. 콰광! 이게 완전히 가상의 이야기였다면 이렇게 물리학 천재들이 동시대에 많이 존재하는데 뭔가 이들을 모을 대형 이벤트가 터져야 하지 않을까 싶은 시점에 벌어지는 사건이죠. 핵폭탄을 만들 이론적 배경이 나왔기 때문에 전쟁이 터진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건 시사하는 점이 있을 것 같네요. 물리학계에서 신 이론이 빵빵 터질 때를 조심할지어다. 네임드의 대량생산은 곧 전쟁의 신호일지니.
오펜하이머는 그래서 결국 핵폭탄을 만든 걸 후회했던 건가 안 했던 건가. 이건 끝까지 모호하게 나옵니다. 그는 후회한다고 말하려고 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말하지 못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오만했으므로. 그리고 사실을 말해야 했으므로.
- 초반에 원자들이 뛰노는 상상도가 나오는데 빅뱅이론에서 물리 이론학자들이 하는 일이 하루 종일 팔짱 끼고 칠판 노려보기라는 게 생각나서 좀 웃겼습니다.
- 와. 청산가리. 진짜?
- 교육적인 전기영화란 얘기만 듣고 극장에 갔다가 뜨악한 학부모들이 많았다는 기사를 본 적 있는데, 특이한 면죄부 장면입니다. 꽤 웃긴 장면이라고 생각하는데 웃기는 타이밍은 아니더군요.
- 정치질은 진짜 적성이 있나 봅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뒤집어지는 걸 보면 이야 정말 골때려요.
- 핵실험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실험 장면은 긴장감 넘칩니다.
- 제독의 말이 맞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도 똑같은 짓을 또 했겠죠. 죄책감과 자긍심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요? 해도 되는 것일까요? 정확히 이러려고 했지만 정말로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적절한 변명인가요? 하지만 그래서 그렇다면. 무슨 죄로 단죄 해야 한단 말입니까?
- 가장 현실에 가까운 현실은 어디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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